번아웃의 징후와 회복법
미국 여성건강기술기업 인코라헬스(Incora Health)의 임상책임자 마조리 젠킨스 박사는 “피로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지만, 번아웃은 정체성을 무너뜨린다. 우리가 누구인지조차 잊게 만든다”고 경고했다. 김정현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최근 20~40대 직장인 중 자신이 번아웃 상태라는 걸 모른 채 피로만 탓하는 환자들이 많다”며 “단순 피로라고 생각하고 방치할 경우, 우울증, 인지 기능 저하, 심한 경우 자존감 상실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뇌 구조까지 바꾸는 ‘진짜 번아웃’
번아웃은 단순한 기분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뇌의 구조와 기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과학적 근거들이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2014년 종합과학저널 플로스원(PLOS ONE)에 게재된 연구에 따르면, 직무 관련 번아웃 환자들은 감정 조절과 결정 기능을 담당하는 전대상피질(ACC)과 배외측 전전두엽(DLPFC)의 회백질 양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 영역들은 스트레스에 대처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신경정신약리학 학술지Neuropsychopharmacology에 실린 다른 연구에서는 공포와 스트레스 반응의 중심인 편도체(amygdala)가 번아웃 상태에서 과도하게 활성화되며, 스트레스 요인이 사라진 후에도 과잉 반응을 보인다는 결과가 보고되었다. 김정현 교수는 이에 대해 “최근 정신과에서는 번아웃을 단순한 감정 문제로 보지 않고 뇌 기능 장애로 접근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신체적 질환 못지않게 번아웃도 조기 진단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케빈 우즈 브레인헬스 기업 브레인FM 책임자는 “번아웃은 뇌의 스트레스 대응 시스템이 고장 난 상태”라며 “원래 단기적 위협에 대응하도록 설계된 인간의 뇌가 현대사회에서 지속적이고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되며,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음은 일상에서 번아웃을 유발하는 주요 요인들이다.
- 과중한 업무와 낮은 통제권: 업무량이 많고 주도권이 적을수록 스트레스가 가중된다.
- 일과 삶의 경계 붕괴: 특히 재택근무나 스마트워크 환경에서 뚜렷한 ‘퇴근’ 개념이 사라짐.
- 가치관과 환경의 불일치: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 업무 환경은 내적 갈등을 불러온다.
- 디지털 중독: 끊임없는 메신저 알림과 이메일 확인이 정신적 소진을 가중시킨다.
- 감정노동과 보상 부족: 특히 돌봄노동이나 의료·교육직 등에서 흔하다.
◇누가 더 번아웃에 취약할까?
번아웃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유형은 특히 고위험군이다.
1. 고스트레스 직군
의료, 교육, 사회복지, 응급서비스 종사자는 장시간 근무와 높은 정서적 노동에 시달리며 번아웃에 가장 취약하다. WHO는 2022년 보고서에서 이들 직군을 ‘우선관리 대상’으로 지정했다.
2. 완벽주의자, 성과지향형 인물
자신에게 과도한 기대를 걸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사람들은 번아웃 신호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약한 자신’을 자책하며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3. 경계 없는 근무환경(재택 프리랜서)
퇴근 후에도 알림과 메일에 반응하게 되면 뇌는 회복 기회를 잃는다.
4. 돌봄노동자 및 여성
자녀 양육, 노부모 부양, 가사노동이 겹치는 경우 번아웃 가능성이 높다. 특히 여성, 그중에서도 유색인종 여성은 보이지 않는 감정노동과 사회적 미세차별(microaggression)에 노출되며 더 큰 위험에 놓인다.
5. 지지체계가 부족한 사람
직장 또는 가정에서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 외부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 탄력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번아웃 회복, 생활 습관에서 시작된다
스트레스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에 대한 회복력과 대응 전략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케빈 우즈 박사는 “만성 스트레스로 인한 뇌 변화는 하루아침에 되돌릴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은 실질적 회복 전략을 제시했다.
- 90분마다 짧은 휴식: 업무 집중 시간 이후 의도적인 휴식으로 인지 과부하 방지
- 대면 교류: 가족, 친구 등과의 직접적인 교류는 정서적 회복에 효과적
- 규칙적인 운동: 하루 20~30분 산책만으로도 기분 및 집중력 향상
- 충분한 수면: 최소 7시간 이상 수면은 뇌 회복의 필수 조건
김정현 교수는 “우리는 아무리 똑똑하고 성공해도 결국 ‘쉼’이 필요하다. 충분히 쉬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에너지를 되찾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사회 전반에 번아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듯, 마음과 뇌가 지친 상태에도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는 지금 ‘피로’한가, ‘번아웃’인가?
단순히 잠이 부족하거나 주말에 무리한 일정이 원인이라면 충분한 휴식으로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을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자도 피곤하다’, ‘감정이 메말라 있는 느낌’이라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수면이 아니라 삶의 재설계일 수 있다. 지금, 자신의 에너지, 동기, 그리고 정체성을 다시 회복할 시간이다.
지종현 하이뉴스(Hinews)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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