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news 하이뉴스] 한 도시가 하나의 전시로 움직이고 있다. 나주다.
‘나주 방문의 해’라는 흐름 위에서, 40여 년 동안 한글을 붙들고 회화로 확장해 온 금보성 작가의 90회 개인전이 금보성비엔날레라는 이름으로 열리며 나주는 여행지가 아니라 전시 현장으로 바뀌고 있다.
조용하던 도시가 달라졌다. 사람의 이동이 아니라, 시선이 이동한다.
한글을 비엔날레의 중심에 두고, 한 작가의 40년 작업 세계를 하나의 독립된 비엔날레로 구성하는 시도는 익숙한 미술의 문법을 벗어난다. 그러나 이 구조는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긴 시간의 축적 위에서만 가능한 형태다.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금보성은 아트센터를 운영하며 수많은 전시를 기획했고, 비엔날레와 아트페어 감독으로서 전시 기획, 공간 운영, 국제 교류를 경험해 왔다. 작가이면서 동시에 기획자였던 시간. 그 시간이 결국 ‘개인 비엔날레’라는 형식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글이 있다.
금보성의 한글회화는 문자 장식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는 완성된 자음과 모음을 다시 해체한다. 그리고 그 이전으로 들어간다.
왜 ‘ㄱ’은 이런 형태인가. 왜 ‘ㅎ’은 이런 구조인가. 자음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세종은 무엇을 상상했는가. 누구를 위해 문자를 만들었는가.
질문은 단순하지만 깊다. 그리고 그 질문을 회화로 다시 여는 행위가 그가 말하는 ‘봉인의 해제’다.
우리는 한글을 매일 쓴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보지 못한다. 금보성은 그 익숙함을 흔든다. 자음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문자 속에 잠들어 있던 창제의 정신을 미술로 끌어올린다.
그 안에는 세종의 마음이 있다. 말은 있으나 글이 없던 사람들에게 언어를 돌려주려 했던 마음. 그 하나의 의지가 한글이라는 체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한글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다. 사람을 향한 철학이다. 그리고 금보성은 그 철학을 색과 선, 형태와 공간으로 옮긴다.
조용하지만 강하게. 그 순간 한국 미학이 다시 질문된다.
해학과 신명, 풍류와 여백. 한국성은 장식이 아니다. 삶 속에서 축적된 감각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으로 넘어서는 해학. 함께 어울리며 솟아나는 신명. 자연과 인간 사이를 흐르는 풍류.
이 감각은 설명보다 체험에 가깝다. 금보성은 이 감각을 한글과 결합해 세계 현대미술과 다른 조형 언어를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실험의 무대가 나주다.
사진제공=송림아트센터
이번 비엔날레에서 나주는 배경이 아니다. 장면이 작동하는 장소다. 한글이라는 문화 자산, 한 작가의 40년 작업, 한국 미학이 지역 공간과 결합해 하나의 현장을 만든다.
도시는 전시가 되고, 전시는 도시가 된다. 미술은 현장에서 완성된다. 사진과 실제는 다르다. 특히 대형 작업 앞에서는 그 차이가 더 선명해진다.
멀리서 본다. 가까이 다가간다. 다시 한 걸음 물러선다. 그 반복 속에서 작품은 이미지가 아니라 공간이 된다. 그리고 그 공간은 몸으로 기억된다. 이 장면은 반복되지 않는다.
40년의 시간이 한 화면에 쌓이고, 한글이 거대한 회화로 공간을 채우는 순간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전시는 사라지고 공간은 바뀐다. 지금의 장면이 내년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 보장은 없다.
짧다. 그래서 더 강하다. 어떤 전시는 미루는 순간 사라진다. 결국 사람들은 시간을 내어 나주로 향한다. 관광지를 하나 더 보기 위한 이동이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한 장면을 보기 위한 선택이다.
조용한 결심처럼. 그 경험은 관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작품 앞에 서면 한글이 다시 보인다. 그 글자를 따라가다 세종의 의도가 떠오른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어떤 문화 속에 있는지 되묻게 된다.
나주에서의 하루는 전시가 아니라 경험으로 남는다. 짧지만 오래 남는 경험이다. 금보성비엔날레는 결과물이 아니다. 과정이다. 한글의 봉인을 풀고, 해학과 신명, 풍류라는 한국 미학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펼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지금 진행 중이다.
언젠가 사진으로 보며 “그때 나주에 갈 걸”이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나주로 가서 그 장면 앞에 서 있을 것인가. 선택은 단순하지만, 결과는 오래 남는다. 지금, 나주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주로 모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