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news 하이뉴스] 정부가 미래 전력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원전의 역할을 논의하는 공론화에 착수한 가운데 환경·시민사회단체가 공론화의 전제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반도체 산업단지와 AI 데이터센터 등 대규모 전력수요를 사실상 전제로 설정한 뒤 이를 충당하기 위한 원전의 역할을 묻는 방식으로는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신규핵발전소저지와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은 지난 23일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원전 공론화 추진계획’을 비판했다.
정부는 앞서 22일 국무회의에 원전 공론화 추진계획을 보고했다. 향후 약 3개월 동안 시민참여단 숙의토론과 전문가 공개토론회, 온라인 의견수렴 등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반영한다는 내용이다.
정부는 이번 공론화가 신규 원전 건설 자체에 대한 찬반을 묻는 절차가 아니라 미래 전력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원전의 역할을 종합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발전 공론화 추진계획 규탄 시민사회 기자회견 <사진=신규핵발전소저지와 핵없는사회를위한 전국행동>
하지만 전국행동은 공론화의 출발점이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반도체 산업단지와 AI 데이터센터 등 이른바 메가프로젝트로 인한 전력수요 증가를 사실상 확정된 전제로 놓은 뒤 이를 충당하기 위한 원전의 역할을 묻는 것은 논의의 범위를 지나치게 좁힌다는 것이다.
전국행동은 메가프로젝트의 규모와 입지, 전력수요 전망의 타당성부터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력수요는 산업단지와 데이터센터의 규모와 입지뿐 아니라 에너지 효율과 수요관리 정책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만큼, 수요 증가 자체를 기정사실로 두고 발전원 선택부터 논의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안재훈 전국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이날 규탄발언에서 정부가 정책 결정의 책임을 시민과 국민에게 넘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안 위원장은 “정부는 고리2호기 수명연장을 추진하면서 안전성과 중대사고 문제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고, 핵발전소 부지마다 쌓여가는 핵폐기물과 월성 최인접지역 주민들의 이주 요구에도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문제는 외면한 채 근거도 제대로 제시하지 않은 전력수요 증가를 이유로 핵발전 확대를 논의하자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정부가 말하는 메가프로젝트가 정말 국민에게 필요한지, 기업에 합당한 책임을 묻고 있는지, 우리 사회의 전력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지를 먼저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헌석 전국행동 공동대표도 공론화의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 공동대표는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전력수요를 언급하며 “그 많은 발전소와 송전선로를 실제로 건설할 수 있는지부터 따져야 하는데 정부는 핵발전소를 어떻게 할 것인가만 묻고 있다”고 말했다.
또 정부가 신규 원전 후보 지역이나 기존 석탄발전소 폐지 부지의 소형모듈원자로(SMR) 건설 가능성 등을 언급해 온 점을 들어 정부의 원전 정책 방향이 이미 상당 부분 제시된 상태라고 주장했다.
이 공동대표는 “국민의 의견을 듣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이미 짜인 계획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형식적인 공론화에는 반대한다”며 “반도체·AI 산업과 핵발전이 함께 갈 수 있는지, 그 전력수요를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숙영 정치하는엄마들 대표는 원전 확대에 따른 지역사회와 미래세대의 부담을 문제로 제기했다.
김 대표는 “2017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에서 국민은 장기적으로 핵발전 비중을 축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며 “정권이 바뀌고 전력수요 전망이 달라질 때마다 국민의 판단을 처음부터 다시 묻기보다 기존 공론화의 결과를 정부가 어떻게 책임 있게 이어갈지 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기를 사용하는 곳과 위험을 감당하는 곳이 분리되면서 발전소와 송전망이 들어서는 지역에 부담이 집중되고 있다”며 “현재 세대의 전력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미래세대에게 핵폐기물과 사고 위험을 물려주는 것이 공익인지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행동은 원전 확대 여부만을 놓고 공론화할 것이 아니라 전력수요 자체에 대한 검증과 함께 수요관리, 에너지 효율 향상, 재생에너지 확대, 전력망 구축 등 다양한 대안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전력수요 전망의 근거를 공개하고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등 대규모 전력소비 사업의 규모와 입지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전국행동은 “공론화는 정부가 이미 결정한 정책을 국민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아니다”라며 “무엇을 결정할 것인지와 정책의 전제, 가능한 대안을 열어둔 상태에서 균형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숙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신규 원전은 건설에 장기간이 소요되는 만큼 정부가 예상하는 전력수요 증가 시점에 맞춰 공급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검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원전 건설에 필요한 비용과 사고 위험, 핵폐기물 문제뿐 아니라 발전소와 송전망 건설 과정에서 특정 지역에 부담이 집중되는 문제까지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국행동은 정부에 ▲핵발전 확대에 맞춘 공론화 계획 중단 ▲반도체·AI 데이터센터 등 메가프로젝트 규모와 입지 재검토 ▲전력수요 전망의 근거 공개 및 원점 재검증 ▲수요감축·효율 향상·재생에너지 확대를 중심으로 한 에너지전환 등을 촉구했다.
전국행동은 “수요감축과 효율 향상, 재생에너지 확대와 핵발전을 같은 논의 테이블에 놓고 경제성과 실현 가능성, 사회·환경적 영향을 비교·검증해야 한다”며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기후·생태적 한계를 바탕으로 전력수요와 에너지전환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참가자들이 “핵발전 확대에 짜맞춘 공론화에 반대한다”, “핵발전 역할보다 수요감축부터 논의하라”, “메가프로젝트 전력수요부터 제대로 검증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같은 날 부산에서도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정부의 원전 공론화 계획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