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news 하이뉴스] 2017년 겨울, 게임 ‘로스트아크’를 개발하던 스마일게이트RPG는 외부 자금을 유치했다. 투자자는 라이노스자산운용. 투자 방식은 전환사채(CB). 당시 계약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었다.
“2022년 당기순이익이 120억 원 이상이면 상장을 추진한다”
투자자에게는 IPO를 통한 투자 회수가 기대였다. 회사 입장에서도 상장은 자연스러운 성장 경로로 보였다. 그러나 6년 뒤, 결과는 정반대가 됐다. 상장은 이뤄지지 않았고, 투자자는 1000억 원 규모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게임 ‘로스트아크’ 개발사 스마일게이트RPG의 IPO 무산을 둘러싼 손해배상 소송 1심 판결이 다음 달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1부(재판장 남인수 부장판사)는 오는 4월 2일 라이노스자산운용 측이 스마일게이트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매매대금 청구 소송의 1심 판결을 선고한다. 이 사건은 ‘IPO를 조건으로 투자받은 기업이 실제로 상장을 하지 않았을 경우 어느 수준까지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분쟁으로 평가된다. 특히 최근 비상장 대형 기업들이 투자 유치 과정에서 상장을 전제로 한 조건을 자주 설정해온 만큼, 판결 결과는 벤처·PE 투자시장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게임 ‘로스트아크’ 개발사 스마일게이트RPG의 기업공개(IPO) 무산을 둘러싼 손해배상 소송 1심 판결이 다음 달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1부(재판장 남인수 부장판사)는 오는 4월 2일 라이노스자산운용 측이 스마일게이트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매매대금 청구 소송(의 1심 판결을 선고한다. <사진 = 연합뉴스 제공>
로스트아크 흥행…“상장은 시간 문제”였던 회사
CB 계약이 체결된 2017년 당시 스마일게이트RPG는 성장 단계의 게임사였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빠르게 바뀌었다. 대표 게임 ‘로스트아크’가 국내외에서 성공하면서 회사 실적이 급격히 뛰었다. 2022년 스마일게이트RPG의 매출은 7370억 원, 영업이익은 3641억 원이었다. 게임업계에서도 손꼽히는 수익성이다. 자연스럽게 IPO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시장에서는 스마일게이트RPG 기업가치를 수조 원대로 평가했다. 회사는 실제로 상장 준비에 들어갔고 주관사로 NH투자증권을 선정했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업계에서는 “상장은 시간 문제”라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했다.
상장을 준비하면서 스마일게이트는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K-IFRS)을 적용했다. 이 과정에서 전환사채를 단순 채무가 아니라 파생상품 부채로 분류했다. K-IFRS는 상장사나 상장 준비 기업이 의무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회계 기준으로, 기업의 재무 상태를 보다 시장 가치 중심으로 평가하도록 하는 국제 기준이다. 기존 국내 회계 기준보다 파생상품이나 금융상품의 가치 변동을 보다 엄격하게 반영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서 스마일게이트RPG가 발행했던 전환사채의 회계 처리 방식도 달라졌다. 전환사채는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붙은 채권이다. 문제는 이 전환권. K-IFRS에서는 전환권이 주가나 기업가치 변동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고 판단되면 이를 파생상품 부채로 분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분류되면 매 회계연도마다 해당 전환권의 가치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 기업 가치가 상승할 경우 전환권의 가치 역시 올라간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권리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계상으로는 회사가 부담해야 할 잠재적 의무가 커진 것으로 해석된다. 이 때문에 기업가치가 크게 상승한 기업의 경우 실제 현금 유출이 없더라도 대규모 평가손실이 장부에 반영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전환사채를 단순 채무가 아니라 파생상품 부채로 분류되면서 회사는 약 5357억 원 규모 평가손실이 발생했다. 회계 장부상으로 스마일게이트RPG는 2022년 1426억 원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스마일게이트 측의 주장을 요약하면 “계약 조건이었던 순이익 120억 원을 충족하지 못했다. 따라서 상장 추진 의무도 사라졌다”는 것. 하지만 투자자인 라이노스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이노스는 회계 처리 선택 자체가 의도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리픽싱 조항이 없는 CB는 자본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많은데, 굳이 부채로 분류해 평가손실을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투자자 측 시각에서는 “회사가 상장 조건을 사실상 회피했다”는 주장이다.
IPO 시장 침체…다른 기업들도 상장 접었다
스마일게이트는 또 다른 이유로 당시 IPO 시장 침체를 들고 있다. 2022년 이후 글로벌 금리 인상과 경기 둔화 속에서 IPO 시장은 급격히 얼어붙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신선식품 플랫폼 마켓컬리다. 마켓컬리는 한때 기업가치 4조 원 이상이 거론되며 IPO 대어로 주목받았지만 2023년 상장을 전격 철회했다. 시장 상황 속에서 기대했던 기업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새벽배송 경쟁사인 오아시스마켓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흑자 기업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상장을 추진했지만, 기관 투자 수요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결국 IPO를 철회했다.
즉 상장을 준비하다가 시장 상황 때문에 멈춘 기업들은 이미 적지 않다는 것이다. 스마일게이트 측은 이런 사례를 들어 상장 철회 역시 기업의 합리적 경영 판단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라이노스 측은 이러한 비교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마켓컬리나 오아시스 같은 플랫폼 기업들은 당시 수익성 문제가 투자자들의 주요 우려였다. 반면 스마일게이트RPG는 상황이 달랐다. 로스트아크 흥행으로 막대한 영업이익을 내는 게임사였기 때문이다. 게임 산업은 글로벌 투자 시장에서도 여전히 높은 관심을 받는 분야다.
투자자 측은 ‘시장 때문이 아니라 회사가 상장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법원이 주목한 ‘손해액’ 문제
이번 재판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손해배상액 산정 문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1부는 변론 종결 과정에서 양측에 손해배상액 규모에 대한 의견 제출을 요구했다. 지금까지는 상장 의무 위반 여부에 대한 공방이 중심이었지만 실제 손해 규모 논의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라이노스가 청구한 소송가액은 약 1000억 원이다. 다만 법원은 손해배상 책임 제한 법리 적용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는 계약 위반이 인정되더라도 모든 손해를 배상하도록 하지 않고 일정 비율로 책임을 제한하는 방식이다. 만약 법원이 이 법리를 적용할 경우 실제 배상액은 청구액보다 크게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
이번 사건은 아직 1심 단계지만 판결 방향에 따라 IPO 조건 투자 계약 구조 자체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 투자은행 업계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하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상장 약속을 어디까지 법적 의무로 볼지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다. 이번 판결이 하나의 가이드라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대형 게임사들이 IPO를 투자 유치 수단으로 활용해온 사례가 많다. 판결 결과에 따라 계약 구조가 훨씬 보수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밝혔다.
6년 전 투자 계약에서 시작된 분쟁은 이제 IPO 투자 계약의 기준을 가르는 판결을 앞두고 있다. 4월 2일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