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 산업일반

중대재해처벌 판결이 주는 위험한 시그널

"중대재해처벌, 합의가 양형기준 되면 안돼"

이상호 기자

기사입력 : 2025-12-17 18:14

[Hinews 하이뉴스] 중대재해처벌법 판결이 안전관리 예방의무의 위험 신호가 되고 있다. 유족과의 합의가 감형요소로 작용하며 예방의무가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질 경우, 기업들이 ‘사전 안전 투자’보다 ‘사고 이후의 합의와 보상’에 자원을 집중하게 되고, 그 결과 중대재해처벌법이 지향하는 예방 중심의 취지가 사법 판단을 통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11월 18일 오후 울산화력발전소 붕괴 현장 합동 감식을 위해 감식팀 관계자들이 차에서 내리고 있다. 울산경찰청 전담수사팀, 경기남부경찰청 중대재해전담 과학수사팀, 국립과학연구원,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공단 등은 이날 오후 2시부터 울산 남구 한국동서발전 울산발전본부 내 사고 현장에서 합동 감식에 들어갔다. (사진 = 연합뉴스)
지난 11월 18일 오후 울산화력발전소 붕괴 현장 합동 감식을 위해 감식팀 관계자들이 차에서 내리고 있다. 울산경찰청 전담수사팀, 경기남부경찰청 중대재해전담 과학수사팀, 국립과학연구원,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공단 등은 이날 오후 2시부터 울산 남구 한국동서발전 울산발전본부 내 사고 현장에서 합동 감식에 들어갔다. (사진 = 연합뉴스)

최근 인천지방법원은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위반(산업재해치사)·산업안전보건법 위반·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된 삼화이앤피 김 모대표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지난 2022년 회사 사업장에서 프레스 설비 인근에서 작업을 하던 50대 노동자가 중량 철강 자재에 의해 크게 다쳤고, 치료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고 당시 피해자는 프레스 설비에 연결된 불량 코일강판을 다시 언코일러 장치로 되감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무게 약 1.18톤에 달하는 코일강판이 회전축을 벗어날 경우 작업자 방향으로 이탈할 수 있는 구조였음에도, 해당 설비 주변에 이를 막기 위한 덮개나 울타리, 슬리브 등 기본적인 안전장치가 전혀 설치돼 있지 않았다. 결국 회전축에서 벗어난 코일강판이 작업 중이던 피해자 쪽으로 쏠리며 떨어져 사고가 발생했다.

이와 관련해 법원은 최근 해당 사고가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 구조적인 안전 관리 실패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사업장 책임자가 공정 특성을 고려한 위험 요소 점검과 예방 조치를 체계적으로 마련하지 않았고, 위험성 평가 결과에 대한 관리·감독도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다.

다만 재판부는 경영진이 재판 과정에서 책임을 인정하고, 유가족과 합의에 도달해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받은 점을 양형에 반영했다.

‘사고 후 합의’가 양형에 영향을 미치면서 피해자 보상이 현장 안전을 강화하는 데 드는 지출보다 적다면 기업이 관련 대응에 더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구조가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 올해 8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쿠팡의 경우, 쿠팡풀필먼트서비스가 2021년 초 내부적으로 마련한 위기 대응 문건에는 사고 이후 대응을 유가족 설득과 보상 중심으로 설계한 정황이 담겨 있다. 해당 자료에는 장례 절차 지원을 협상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유가족과의 관계를 관리 대상으로 설정하는 표현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쿠팡이 별도의 대관·대외협력 조직을 대규모로 운영하고 있다는 점은, 사후 분쟁 관리에 상당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1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강당에서 열린 대법원 양형위원회 산하 양형연구회 주최 ‘중대재해 처벌과 양형’ 심포지엄에서는 해당 논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심포지엄 발표에 따르면 2022년 1월 법 시행부터 지난 9월까지 유죄 판결이 내려진 138건(자연인 70건, 법인 68건)을 분석한 결과 피고인 70명에게 선고된 유죄 판결 중 징역형 실형은 6건(8.57%), 집행유예가 61건(87.14%)으로 파악됐다.
심포지엄 발표에 따르면 2022년 1월 법 시행부터 지난 9월까지 유죄 판결이 내려진 138건(자연인 70건, 법인 68건)을 분석한 결과 피고인 70명에게 선고된 유죄 판결 중 징역형 실형은 6건(8.57%), 집행유예가 61건(87.14%)으로 파악됐다. (자료제공 = 대법원 양형위원회 운영지원단)
심포지엄 발표에 따르면 2022년 1월 법 시행부터 지난 9월까지 유죄 판결이 내려진 138건(자연인 70건, 법인 68건)을 분석한 결과 피고인 70명에게 선고된 유죄 판결 중 징역형 실형은 6건(8.57%), 집행유예가 61건(87.14%)으로 파악됐다. (자료제공 = 대법원 양형위원회 운영지원단)

이 자리에 참석한 범선윤 광주지법 순천지원 부장판사는 “인명피해라는 중한 결과가 발생한 사건임에도 실형률이 8.57%로 나타난 이유는 ‘유족(또는 피해자)과의 형사합의’를 통해 유족이 법원에 피고인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는 사정이 주요 양형요소로 참작됐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고 밝혔다.

이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 내 의사결정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이뤄지기 마련이고, 그 위험이나 비용은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전가되는 경향이 있다”면서 “형사처벌을 받게 되는 경영책임자와 기업은 형량을 줄이기 위해 유족과 형사합의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 덧붙였다.

그는 “중대재해로 생계에 타격을 입게 되는 유족의 입장에선 이미 기업에 대해 산업재해 발생을 원인으로 한 민사상 손해배상청구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경제적 이유로 형사합의에 응할 유인이 커지게 된다”며 “이런 상황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유족에게 지급하는 형사합의금 등 사후적 비용이 기업이 근로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의무에 충실하고도 철저하게 이행하는데 드는 비용보다 압도적으로 크지 않으면 기업은 여전히 안전에 투자하기보다는 사고처리에 집중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지원 의정부지법 남양주지원 판사 또한 “결국 중대재해법 위반범죄의 양형인자로서 ‘처벌불원 또는 실질적 피해 회복(공탁 포함)’만을 두는 경우 중대재해 예방이라는 입법목적이 충분히 달성되지 않을 우려가 있다”며 “이러한 특수성을 고려할 때 유족과의 합의에 지나치게 큰 효과를 부여하기보다는 재발방지조치의 이행과 병행돼야 한다는 발표자의 견해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23명이 숨진 아리셀 화재 1심 사건을 참작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했다.

“유족은 막다른 길에 몰려 생계 유지를 위하여 선택의 여지 없이 합의에 이르게 되어 결국 기업가는 합의가 되었다는 이유로 선처를 받게 되는 선례가 많다. 자신의 사업장에서 산업재해가 발생할 가능성은 확률적으로 매우 낮고, 매출과 영업이익, 순이익은 당장 장부상에 숫자로 찍히므로 기업가는 다른 기업가가 위와 같이 선처를 받는 것에 대한 학습효과로 이윤 극대화에 몰두하는 기업 경영을 하게 된다. 나중에 매우 낮은 확률로 산업재해가 발생하더라도 그동안에 벌어 놓은 돈으로 합의를 하면 선처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순환을 뿌리뽑지 않는 한 우리나라에서 산업재해 발생률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피고인들이 유족들과 합의하였다는 사정은 일부 제한적으로만 양형 사유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

법조계 한 인사는 이와 관련해 “중대재해처벌법의 취지는 ‘중대재해를 예방하고 시민과 종사자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아리셀 재판의 판결은 이 취지를 반영한 것”이라면서 “양형에 합의가 들어서는 순간 이 취지는 변질되고 말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법무부가 지난 5월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중대재해처벌법 양형기준 제정을 공식 요청한 만큼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상호 기자

leesh@hinews.co.kr

<저작권자 © 하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