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다 정치, 원칙보다 발언…트럼프가 흔드는 글로벌 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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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다 정치, 원칙보다 발언…트럼프가 흔드는 글로벌 통상

이상호 기자

기사입력 : 2026-02-23 10:12

[Hinews 하이뉴스] 미국의 ‘상호관세’를 둘러싼 법적·정책적 대혼란이 전 세계 통상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전 세계에 부과했던 이른바 상호관세에 대해 미국 연방대법원이 위법 판단을 내리면서, 각국 정부와 기업들은 새로운 셈법에 들어갔다. 법적 기반이 무너진 관세 정책을 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법 조항을 동원해 재구성하겠다고 공언하면서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양상이다.

지난 20일(현지 시간) 미국 연방대법원은 6대 3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조치가 위법이라고 판단했다.

연방대법원은 위법 판결을 하면서 “헌법 제1조는 조세와 관세를 포함한 과세 권한을 의회에 부여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형식적 권한이 아니라 국민 대표 기관에 귀속된 실질적 권한”이라고 전제했다. 이어 “행정부가 비상 권한을 근거로 광범위한 관세를 부과하려면, 의회가 그 권한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위임했음이 확인돼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특히 IEEPA의 문언과 입법 취지를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IEEPA는 자산 동결, 거래 제한, 수출입 통제 등 경제적 제재 수단을 열거하고 있으나, 관세 부과와 같은 일반적·전면적 과세 권한을 대통령에게 위임한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관세는 본질적으로 세금의 일종이며, 광범위한 세율 결정은 중대한 정책 판단에 해당한다”

판결문은 이른바 ‘중대한 질문 원칙(major questions doctrine)’도 언급했다. 미 연방대법원은 “국가 경제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권한의 이전은 명확한 의회 의사 없이는 추정될 수 없다”면서 “의회가 그러한 권한을 위임하려 했다면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무역적자의 존재 자체가 곧바로 IEEPA가 예정한 ‘이례적이고 비상한 위협(unusual and extraordinary threat)’에 해당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은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경제 현상을 비상사태로 재분류하는 것은 행정부 권한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확장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같은 날 백악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대법원을 정면 비판하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그는 “이번 판결은 IEEPA의 사용 방식만 문제 삼은 것일 뿐, 관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즉각 대체 수단을 가동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무역법 122조를 근거로 최대 15%의 글로벌 관세를 추가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겠다고 공언했고, 무역확장법 232조, 무역법 201조·301조, 관세법 338조 등도 동원 가능 수단으로 거론했다.

무역법 122조는 무역수지 적자 해소를 위해 150일간 최대 15%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다만 150일 이후에는 의회 승인이 필요하다. 무역확장법 232조는 국가안보 위협을 이유로 품목별 관세를 부과할 수 있게 하며, 무역법 301조는 불공정 무역 관행을 근거로 보복관세를 허용한다.

이 같은 강경 기조는 ‘관세 환급(Refund)’ 문제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관세환급은 미 대법원이 IEEPA에 근거한 상호관세를 위법이라고 판단함에 따라, 그동안 해당 법적 근거로 징수된 관세를 수입업체들에게 돌려줘야 하느냐는 쟁점을 의미한다. 즉, IEEPA를 근거로 부과된 상호관세가 법적으로 무효라면, 미국 세관·국경보호국(CBP)이 이미 징수한 관세 역시 법적 근거를 상실한 것이 아니냐는 논리다.

미국 수입업체들은 자신들이 납부한 관세가 위법한 조치에 따른 것이므로 환급 대상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특히 자동차 부품, 전자제품, 소비재 등을 대량 수입해 온 기업들은 수억 달러에서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환급 청구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날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환급 문제에 대해 명확히 선을 그었다.

그는 “그들(대법관들)은 수개월 동안 의견을 준비했지만 환급 문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판결이 자동 환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 “그 문제는 앞으로 소송에서 다투게 될 것이며, 아마 5년은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행정부가 자발적으로 관세를 돌려줄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 발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우리는 국가를 위해 정당하게 관세를 거둬들였다”며 “미국을 오랫동안 이용해 온 나라들을 상대로 거둔 돈”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이는 환급을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법적으로도 환급은 단순하지 않다. 판결이 ‘향후 효력만’ 인정되는지, 아니면 ‘소급 무효’를 의미하는지에 따라 환급 범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행정부는 판결의 적용 범위를 제한적으로 해석해, 이미 확정된 과세에 대해서는 소급 적용을 최소화하려 할 가능성이 있는 반면 수입업체들은 위헌·위법 행위에 따른 부당이득 반환을 주장하며 집단소송에 나설 수 있다.
미국의 ‘상호관세’를 둘러싼 법적·정책적 대혼란이 전 세계 통상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전 세계에 부과했던 이른바 상호관세에 대해 미국 연방대법원이 위법 판단을 내리면서, 각국 정부와 기업들은 새로운 셈법에 들어갔다. 법적 기반이 무너진 관세 정책을 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법 조항을 동원해 재구성하겠다고 공언하면서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양상이다. (사진 = 연합뉴스 제공)
미국의 ‘상호관세’를 둘러싼 법적·정책적 대혼란이 전 세계 통상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전 세계에 부과했던 이른바 상호관세에 대해 미국 연방대법원이 위법 판단을 내리면서, 각국 정부와 기업들은 새로운 셈법에 들어갔다. 법적 기반이 무너진 관세 정책을 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법 조항을 동원해 재구성하겠다고 공언하면서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양상이다. (사진 = 연합뉴스 제공)


EU "합의는 합의" 약속 이행 촉구... 다른 국가는 '신중론'
대법원의 판결과 트럼프의 후속조치 발언 이후 국제사회는 즉각 반응했다. 현지시간 22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공식 성명을 통해 미국 정부에 향후 조치에 대한 전면적인 설명을 요청했다.

EU는 2025년 8월 EU·미 공동 성명을 통해 상호관세율을 30%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60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IEEPA 관세가 위법으로 판단되면서, 해당 합의의 법적·정치적 토대가 흔들리게 됐다.

EU는 “합의는 합의”라며 미국이 공동 성명에 명시된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EU 제품이 합의된 상한선을 초과하는 관세 인상 없이 가장 경쟁력 있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동시에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무역·경제안보 담당 집행위원이 미 무역대표부(USTR), 상무부와 긴밀히 접촉하고 있다고 밝히며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일본은 즉각적인 강경 대응 대신 신중 기조를 택했다. 일본 정부는 “미국의 후속 조치를 면밀히 주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자국 기업에 미칠 영향을 분석 중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일본 정치권 일각에서는 위법성이 인정될 경우 이미 납부한 관세의 환급 문제를 적극 제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대만도 미국의 정책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대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미국의 사법 절차와 정책 결정을 존중한다”면서도, 향후 관세 적용 여부와 범위를 분석해 필요한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호주는 보다 직접적인 우려를 표명했다. 호주 무역 당국은 미국의 추가 관세 확대 가능성이 현실화될 경우 자국 수출에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미국과의 교역 조건에 대한 협의를 강화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정부와 정치권 발빠른 대처.. 9일까지 대미투자 입법
국내 정치권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 대법원 판결 이후 더불어민주당과 정부, 대통령실이 참여한 비공개 통상 현안 점검회의가 서울 종로구 삼청동 금융연수원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당·정·청은 대미투자특별법의 조속한 입법이 국익에 최선이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3월 9일까지 차질 없이 처리하기로 뜻을 같이했다.

회의에서는 섣부른 선제 대응을 자제하자는 의견이 다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이 무역법 301조 등을 활용해 특정 국가를 ‘시범 케이스’로 삼아 보복 조치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하이뉴스>와의 통화에서 “현재로서는 미국의 법적 공방이 완전히 정리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강경한 메시지를 낼 경우 오히려 협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며 “대법원 판결과 백악관의 후속 조치를 모두 지켜보면서 단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어 “관세 환급 문제가 본격적인 집단소송으로 이어질 경우 미국 내 정치·경제적 파장이 상당할 수 있다”며 “환급 범위가 어떻게 정리되느냐에 따라 한미 통상 환경도 다시 설계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이 무역법 122조나 232조 등 다른 법적 수단으로 관세를 재부과할 경우, 형식은 달라지더라도 실질적 부담은 유지될 수 있다”며 “단순히 IEEPA 위법 판결만 보고 안도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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